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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March 6, 2016

Aesop too knew the truth of Duality as Unity and Unity as Duality. ㅡ이솝도 그런 말을 했어? 놀라운데!



Every truth has two sides; it is as well to look at both, before we commit ourselves to either.  

 -Aesop












When you think you have every reason to cry,
remember that you also have every reason to smile.
That is what Aesop wants to talk to you by saying,



"Every truth has two sides; it is as well to look at both, before we commit ourselves to either." 



So we have named these looks(Aesop Looks) Aesopie Aesop. Aesopie is first name and Aesop surname like Mickey Mouse and Donald Duck. Aesopie Aesop has two looks to look at. We expect you to love Aesopie Aesop.  





"모든 진실은 양면성이므로 어느 한 쪽에 자기 명을 걸기 전에 양쪽을 다 살핌이 슬기롭다."        ㅡ이솝 

이 때의 번역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 또는 "실상". 왜냐, 진리는 하나일 뿐, 둘은 아니므로. 

놀라울 것은 없지. 그것은 상식이고 상식대로 말한 것이니까. 이솝은 상식대로 판단하고 어느 한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자(賢者, the Wise)라는 것이올시다. 


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거든,
빙그레 할 수밖에 없음도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이것이 이솝이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이솝이 "양자 얽힘"의 "엎 스핀"과 "다운 스핀"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상식대로 말하고 그 스스로 또한 이를 믿은 것이다. 진리는 평범한 데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음양 사상도 이런 상식에서 출발한 것일 뿐이다. 단지 그리스의 이솝이나 황하 유역의 주역(周易)인들이나 그런 상식을 확신하고 이 삶의 율례(律例)를 따라 즉 자기가 아는 한 그 나름대로의 믿음에 충실하였다는 그 차이다. 곧 현자와 치인(癡人, idiot)의 차이인 것이다. 왜 우자(愚者)가 생기느냐 하면 상식적으로 판단하기는 하는데 그것을 자기의 소소한 일상적 욕심에 더 쫓겨 무시해 버리는, 그래서 그 상식대로 판단하여 얻은 결론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니면 다시 말해 미심쩍으면 그것을 골똘히 생각하여 최종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고 그냥 무심하게 팽개쳐버림에서 오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다. 야곱은 인생 문제를 사색하는 사람이었고 에서는 한 때 세상 즐기는 데에만 세월 가는 줄 몰랐던 유형이다.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마음이라야 진리에 들어갈 수 있는데, 내일 죽을지 오늘 이 시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거늘 여기에 대해 거의 무관심으로 지내니 이런 사람은 헛사는 것이다. 더욱이 한심스러운 것은 오늘날의 대부분의 "기독교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직접 부지런히 읽어 알려고 할 생각은 없이 사람이 가르치는 교리에다 자기의 신명을 내맡겨 "나는 구원 받았으니 아무 일 없다" 식으로 천하 태평으로 세상 삶에만 코가 빠져 있으니 나중에 일을 당하고 나서야 후회해본들 누구를 탓할 수도 없게 된다. 자기의 어리석음을 자기 스스로가 잘 알게 될 터이니까. 상식이 실종된 세상이다. 그야말로 몰상식의 세대다. 

성경은 상식으로 읽는 책이다. 자아중심으로만 몰입해 있으니까 양심마저 마비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는 이들이다. 마지막 아담께서 나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바울이 밝힌 대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를 바치신"(갈 2:20) 사실에서 출발하는 깨달음이다. 막연히 "우리"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중심이 되시어 그렇게 하셨다면 나 역시 당연하게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상식이고 양심이다. 다시는 나(자아) 중심이 아닌 상대방(그리스도)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 위해 살고 죽는 것"(롬 14:7)이라면 그런 지독한 이기주의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에의 길을 차단하신다는 점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양식(良識)도 능히 수긍할 수 있는 사실이다. 

양심은 인간의 육비(肉碑) 또는 심비(心碑)에 하나님이 새겨주신 불문율이다(롬 2:15). 때문에 바울은 항상 "매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행 23:1/딤후 1:3) 했고,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행 24:26) 했다. 믿음과 양심은 항상 병행하는 것이요 이와 입술 사이다(딤전 1:5,19/3:9). 베드로는 "때 묻지 않는 양심을 가지라"고 주님 안에서 명령하고 있다(벧전 3:16). 양심은 상식과도 불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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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act of kindness, no matter how small, is ever wasted.


One of "Aesop Sayings" to Be Long Remembered



세상에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 것 있으니 바로 친절.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이솝의 말)


바람과 해와 나그네

바람과 해가 하루는 누가 더 센지 힘 겨루기를 하자고 옥신각신하다가 저 쪽에서 한 나그네가 오기에 누가 저 외투를 벗길 수 있는지 해보자고 해가 제안하고는 바람더러 먼저 시작하라 하고 자기는 구름 뒤에 숨었겠다. 바람이 젖먹은 힘을 다해 힘을 쏟아 부으니 나그네는 엇 추워! 엇 추워! 하면서 외투를 더욱 더 여미고 또 여민다. 할 수 없어 바람은 물러나고 해가 따스함으로 어루만져 주니 나그네는 두 말도 없이 제 스스로 외투를 홀가당 벗어 버렸다.     


Aesop's Fable

The Wind and the Sun





The Wind and the Sun were disputing which was the stronger. 
Suddenly they saw a traveller coming down the road, and the Sun said: 
"I see a way to decide our dispute. Whichever of us can cause that traveller 
to take off his cloak shall be regarded as the stronger. 
You begin." So the Sun retired behind a cloud, 
and the Wind began to blow as hard as it could upon the traveller. 
But the harder he blew the more closely did the traveller wrap his cloak round him, 
till at last the Wind had to give in despair. 
Then the Sun came out and shone in all his glory upon the traveller, 
who soon found it too hot to walk with his cloak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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